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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시미노미야 사다후사 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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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시미노미야 사다후사 친왕은 일본 무로마치 시대의 황족으로, 후시미노미야 요시히토 친왕의 아들이다. 어린 시절 이마데가와 가문에서 양육되었으며, 40세에 후시미노미야 가문을 계승했으나, 형의 죽음과 관련한 혐의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쇼코 천황의 후계자 후보로 지명되었으나 출가하여 도흠 뉴도 친왕으로 불렸다. 이후 고하나조노 천황의 아버지로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태상천황의 존호를 받았으나 사퇴했다. 그는 렌카, 바둑, 쌍륙 등 다양한 문화 활동에 참여했으며, 고쇼 2년(1456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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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시미노미야 사다후사 친왕
기본 정보
인명사다후사 친왕
각국어 표기해당 사항 없음
가문/작위후시미노미야
신분친왕, 태상천황(법황)
경칭전하
어인해당 사항 없음
출생일응안 5년 3월 5일(1372년4월 9일)
출생지해당 사항 없음
사망일강정(康正) 2년 8월 29일(1456년9월 28일) (84세 몰)
사망지해당 사항 없음
매장일해당 사항 없음
매장지후시미 마쓰바야시인 능
배우자 1니와타 사치코(미야스코로)
배우자 2해당 사항 없음
자녀고하나조노 천황
사다쓰네 친왕
그 외
아버지후시미노미야 요시히토 친왕
어머니오기마치산조 하루코
칭호도킨 입도 친왕
추호고소코인(후소코 천황)
사다후사 친왕 꽃잎
사다후사 친왕 꽃잎
가계
조상후시미노미야 요시히토 친왕의 제2왕자
숭광 천황의 황손
자녀슬하 15남녀
기타 정보
묘소후시미 능 내 후시미 마쓰바야시인 능
관련 인물고하나조노 천황 (제1황자)
쇼코 천황
고코마쓰 천황
아시카가 요시모치
아시카가 요시카즈
아시카가 요시나리
저서간문일기
참고 문헌춘엽기

2. 생애

오에이 18년(1411년) 4월 4일, 40세가 되어서야 아버지 요시히토 친왕에게서 후시미 고쇼(伏見御所)에서 원복을 치르고 사다후사라는 이름을 받았다. 어린 시절부터 이마데가와 가에서 양육되었으며, 좌대신이마데가와 긴나오와 그의 조카 좌대신 긴유키가 양부모가 되어, 사다후사는 평생 그들의 은혜를 잊지 않았다. 음악와카에 친숙해진 것도 어린 시절의 환경 덕분이었다.

오에이 23년(1416년) 11월 20일, 아버지 요시히토 친왕이 사망하고, 이듬해 형 하루히토 왕마저 급서하면서 사다후사가 후시미노미야를 계승하게 되었으나, 형을 독살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고코마쓰인과 아시카가 요시모치의 도움으로 상황은 확대되지 않았지만, 스코 천황의 정통 후손이었던 후시미노미야 가문은 당시 북조 계통의 왕실로부터 견제를 받았다. 쇼코 천황의 총애를 받던 나이시(内侍)가 임신하자 천황으로부터 사다후사의 아이라는 혐의를 받았으나, 요시모치의 중재로 위기를 넘겼다. 또한, 고코마쓰인에게 몰수당했던 영지를 둘러싸고 나오히토 친왕의 자녀들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오에이 32년(1425년) 2월, 쇼코 천황의 동생 오가와노미야가 사망하면서 후사 문제가 불거졌고, 사다후사는 고코마쓰인의 유자(猶子)로서 친왕선하를 받았다. 그러나 이는 쇼코 천황의 분노를 사, 윤6월 3일 후시미의 지월암(指月庵)에서 출가하여 도흠(道欽)이라는 법호를 받았다. 이후 렌카, 바둑, 쌍륙 등의 유희에 몰두하며 여생을 보냈다.[7]

쇼초 원년(1428년) 7월, 쇼코 천황이 위독해지자, 6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의 비호 아래 도흠의 아들 히코히토 왕(彦仁王)이 고하나조노 천황으로 즉위했다. 고코마쓰인이 사망한 후, 도흠은 천황의 친아버지로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분안 4년(1447년) 11월 27일, 태상천황 존호가 올려졌으나, 이듬해 사퇴했다. 고쇼 2년(1456년) 8월 29일, 세상을 떠났으며, 묘소는 후시미 쇼린인노 미사키(伏見松林院陵)이다.

2. 1. 어린 시절과 교육

오에이 18년(1411년) 4월 4일, 40세가 되어서야 아버지 요시히토 친왕에게서 후시미 어소에서 원복을 치르고 사다후사라는 이름을 받았다. 어린 시절부터 이마데가와 가에서 양육되었다. 좌대신이마데가와 긴나오와 그의 조카 좌대신 긴유키가 양부모가 되어, 사다후사는 평생 그들의 은혜를 잊지 않았다. 음악와카에 친숙해진 것도 어린 시절의 환경 덕분이었다.[5]

2. 2. 후시미노미야 계승과 논란

오에이 23년(1416년) 11월 20일, 아버지 요시히토 친왕이 사망하고 그 뒤를 이었던 형 하루히토 왕도 이듬해(1417년) 2월 11일에 급서하면서 사다후사가 뒤를 잇게 되었다. 하지만 사다후사에게는 형 하루히토를 독살하고 후계를 가로챘다는 혐의가 따라다녔다.[1] 고코마쓰인이나 4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모치로부터 안도를 받아 상황이 확대되지는 않았지만, 후시미노미야 집안은 쇼헤이 일통 무렵 폐위되어 요시노에 납치된 스코 천황의 정통 적자 계통이었기 때문에, 스코 천황의 동생 고코곤 천황에 의해 재흥된 북조 계통이었던 당시의 일본 왕통으로부터 시기와 의심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오에이 25년(1418년) 7월, 쇼코 천황의 총애를 받던 나이시(内侍)가 임신하자 천황으로부터 사다후사의 아들이라는 혐의를 받았지만, 요시모치의 주선으로 사다나리는 기청문을 제출하여 궁지를 벗어났다.[1]

또한 후시미노미야 집안은 고코마쓰인이 조코도령(長講堂領) 등을 몰수했을 때 쇼코 천황과 함께 폐위된 동궁 나오히토 친왕이 상속받은 무로마치인령(室町院領)을 대신 받았지만, 사다후사가 무로마치인령 이외의 나오히토가 남긴 영지도 무로마치인령이라고 주장하며 나오히토의 자녀들로부터 몰수하려 했기 때문에 양자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나오히토의 자녀는 모두 출가하여 자손이 없었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단절과 함께 후시미노미야령에 편입되었다).[2]

2. 3. 친왕 선하와 출가

오에이 32년(1425년) 2월, 쇼코 천황의 동생인 황태제(皇太弟) 오가와노미야가 사망하자,[7] 사다후사는 이전부터 병약하여 후사가 없었던 천황의 계승자 후보가 되었다. 같은 해 4월 16일에는 고코마쓰인의 유자(猶子)로서 친왕선하를 받았다.[7] 그러나 이는 천황의 역린을 건드리는 일이었고, 사다후사는 불과 3개월 후인 윤6월 3일에 후시미의 지월암(指月庵)에서 머리를 깎았다.[7] 출가 후 법호는 도흠(道欽)이며, 이후 도흠 뉴도 친왕(道欽入道親王)이라 불렸다.[7]

2. 4. 고하나조노 천황 즉위와 만년

쇼초 원년(1428년) 7월, 쇼코 천황이 위독해지자 6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는 도흠의 첫째 왕자 히코히토 왕(彦仁王)을 비호하며 고코마쓰인에게 새로운 천황으로 지명할 것을 요구했다. 고코마쓰인은 쇼코 천황 사후 히코히토 왕을 유자로 삼고 양국의 의(譲国の儀)를 거행하여 즉위시켰다(고하나조노 천황).[8]

이후에도 고코마쓰인이 치천의 군으로서 원정을 계속했기 때문에 도흠은 눈에 띄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에이쿄 5년(1433년) 고코마쓰인이 사망하자, 도흠은 천황의 친아버지로서 존재감을 드러냈고, 에이쿄 7년(1435년)에는 새로운 후시미 고쇼(伏見御所)를 건설하여 거처를 옮겼다.

분안 4년(1447년) 11월 27일, 고타카쿠라인의 선례에 따라 도흠 뉴도 친왕에게는 등극하지 않은 천황에게 주어지는 태상천황 존호가 올려졌고, 법황으로 대우받았다(고스코인後崇光院). 그러나 도흠은 신중한 태도를 보여 이듬해 2월 22일에 사퇴했다.

고쇼 2년(1456년) 8월 29일 사망했다. 묘소는 후시미 쇼린인노 미사키(伏見松林院陵)이다.
후시미 쇼린인 능

3. 가계

후시미노미야 사다후사 친왕은 니와타 쓰네아리의 딸인 니와타 사치코를 시녀로 두었으며, 그녀와의 사이에서 여러 자녀를 두었다.

사다후사 친왕의 가계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첫째 아들인 고하나조노 천황은 현재의 황실(나루히토 및 3 친왕)로 이어졌고, 둘째 아들인 후시미노미야 사다쓰네 친왕은 후시미노미야를 계승하여 구 황족으로 이어졌다.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 1947년 신적강하된 11개 궁가 51명 (소위 구 황족)의 혈통은 모두 후시미노미야 계통이다.

3. 1. 처와 자녀

女房|뇨보일본어 니와타 사치코(니와타 쓰네아리의 딸)

이름출생 - 사망비고
제1왕녀세이케이 여왕(聖冏女王)일본어(아고고)1416年|1416년일본어 - 1441年|1441년일본어산지치온지(이리에전)
제1왕자고하나조노 천황(後花園天皇)일본어1419年|1419년일본어 - 1470年|1470년일본어현재의 황실(나루히토 및 3 친왕)으로 이어진다.
제2왕녀메코코1421年|1421년일본어 - ?덴노지 묘겐인
제3왕녀리엔 여왕(理円女王)일본어1423年|1423년일본어 - ?신조지
제2왕자후시미노미야 사다쓰네 친왕(貞常親王)일본어1425年|1425년일본어 - 1474年|1474년일본어후시미노미야 제4대 당주구 황족으로 이어진다.'''
제5왕녀치요치요1430年|1430년일본어 - ?
제6왕녀운가쿠 세이초(雲岳聖超)일본어1434年|1434년일본어 - 1482年|1482년일본어曇華院|돈게인일본어
女房|뇨보일본어제4왕녀1428年|1428년일본어 - 1430年|1430년일본어


4. 현대 황실과의 관계

고하나조노 천황(히코히토 왕)은 후시미노미야 사다후사 친왕의 첫째 아들로, 그의 혈통이 현재 황실로 이어지고 있다. 한편, 사다후사 친왕의 둘째 아들인 후시미노미야 사다쓰네 친왕은 후시미노미야를 계승하여 후대에까지 그 혈통을 이었다.

메이지 시대에는 후시미노미야 구니이에 친왕의 자손들로부터 많은 궁가가 창설되었는데, 이들을 후시미노미야 계 황족이라고 한다.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후 1947년신적강하로 황적에서 이탈한 구 황족 11개 궁가 51명[8] 역시 이 후시미노미야의 혈통이다.

헤이세이 시대에 들어 황족 남성(황위 계승권자)의 수가 감소하면서 황위 계승 문제가 표면화되었고, 그 해결책 중 하나로 구 황족의 황적 복귀가 거론되고 있다. 이때, 사다후사 친왕은 현 황실과 구 황족 양쪽 모두의 남계에서 "가장 가까운 공통 조상"(MRCA)으로 중요한 연결 고리가 된다.

다만, 여계를 포함할 경우에는 에도 시대레이겐 천황이 더 가까운 MRCA가 된다. 이는 레이겐 천황과 케이호몬인의 딸인 후쿠코 내친왕이 후시미노미야 구니나가 친왕에게 시집가 후시미노미야 사다타테 친왕을 낳았고, 사다타테 친왕의 증손이 11개 궁가의 시조인 후시미노미야 구니이에 친왕이기 때문이다.[8]

5. 문화적 업적

렌카, 와카에 뛰어나고, 바둑, 스고로쿠 등 예능에도 재능을 보였다.[7] 어린 시절 이마데가와 가에서 양육되었는데, 좌대신 이마데가와 긴나오와 그의 조카 좌대신 긴유키가 양부모가 되어 사다후사 친왕은 평생 그들의 은혜를 잊지 않았다. 음악와카에 친숙해진 것도 어린 시절의 환경 덕분이다.

6. 평가

오에이(応永) 23년(1416년) 형 하루히토 왕이 급서하면서 사다후사가 후시미노미야를 계승했으나, 일각에서는 그가 형을 독살하고 후계를 가로챘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5] 고코마쓰인(後小松院)과 4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모치의 비호로 의혹은 확대되지 않았지만, 후시미노미야 집안은 스코 천황의 정통 적자 계통이었기에 당시 북조 계통의 왕실로부터 견제를 받았다.

쇼코 천황의 총애를 받던 나이시(内侍)가 임신하자, 천황은 사다후사의 아들이라고 의심하며 그를 압박했다. 사다후사는 요시모치의 주선으로 기청문을 제출하여 위기를 모면했다.[5]

사다후사는 무로마치인령(室町院領)을 둘러싸고 나오히토 친왕의 자녀들과 재산 분쟁을 벌였다. 그는 나오히토 친왕이 남긴 영지를 모두 무로마치인령이라 주장하며 몰수하려 했으나, 나오히토 친왕의 자녀들은 모두 출가하여 자손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후시미노미야령에 편입되었다.[6]

쇼초(正長) 원년(1428년) 쇼코 천황이 위독해지자, 6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는 사다후사의 아들 히코히토 왕(彦仁王, 훗날의 고하나조노 천황)을 차기 천황으로 지명하도록 고코마쓰인에게 압력을 가했다.[8] 고코마쓰인은 히코히토 왕을 유자로 삼아 즉위시켰고, 이후에도 인세이를 펼쳤다. 사다후사는 고코마쓰인 사후, 천황의 친아버지로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분안(文安) 4년(1447년), 사다후사는 고타카쿠라인(後高倉院)의 선례에 따라 태상천황(太上天皇)의 존호를 받았으나, 신중한 태도로 이듬해 사퇴하였다.

참조

[1] 문서 看聞日記 1408-07-14
[2] 서적 女院領の中世的展開 同成社
[3] 서적 碁 法政大学出版局
[4] 서적 朝日日本歴史人物事典
[5] 문서 看聞日記 1408-07-14
[6] 서적 女院領の中世的展開 同成社
[7] 서적 碁 法政大学出版局
[8] 인용 朝日日本歴史人物事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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